본문 바로가기

수학 이야기/ㅅ ● 수학자

알렉산더 그로텐디크(Alexander Grothendieck, 1928년 3월 28일~ )는 20세기에 활동한 많은 수학자들 중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수학자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알렉산더 그로텐디크(Alexander Grothendieck, 1928년 3월 28일~ )는 20세기에 활동한 많은 수학자들 중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수학자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함수해석학(functional analysis)와 호몰로지 대수학(homological algebra),
그리고 특히 대수기하학(algebraic geometry)에서 혁혁한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그로센딕이 호몰로지 대수학과 대수기하학에서 남긴 업적들은 두 분야의 지형과 연구 방법, 관점 등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혁명적인 업적들이었다.

호몰로지 대수학에서는 최초로 Derived functor의 개념을 창안했으며 (도호쿠 대학 수학 저널에 실렸다.),
대수기하학에서는 스킴(scheme)이론으로 기존의 언어들을 완전히 새로 썼으며, 호몰로지 대수학의 기술을 스킴 이론에 철저하게 적용시켜 수없이 많은 대수기하학의 문제들을 새롭게 증명하거나, 혹은 새로운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스킴 이론이 대수기하학에 도입됨으로써 비로소 수학자들은, 오랜 시절부터 많은 수학자들의 꿈이었던, 정수론과 대수기하학을 통합된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 이후에도 그가 만들어 낸 모티브에 대한 가설은 그로텐디크가 수학을 관둔 이후 수십 년간 많은 수학자들이 연구 방향을 잡는 이정표 역할을 해 주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블라디미르 보예보츠키같은 수학자
2002년 모티브에 대한 일부 가설들을 증명하여 필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로텐디크 자신도 위에서 언급한 위대한 업적들로 인해 1966년 필즈상을 수상하였으며,

1988년에는 또 다른 필즈상 수상자인 수학자 피에르 들리뉴 (Pierre Deligne)와 함께 크라포르드 상(Crafoord prize)의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나, 그로텐디크 본인이, 윤리적인 문제를 들어 수상을 거절하기도 했다.

그로텐디크의 업적들은, 그 현란한 추상적인 접근 방식과,
그 추상적인 아이디어들을 표현하는 그로텐디크의 완벽주의적 정신의 결정체로 유명하다.


그로텐디크의 수학적 업적

그로텐디크가 대수기하학을 시작했을 무렵, (sheaf) 이론이 오카 기요시(岡 潔)와 장 르레이(Jean Leray)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후, 세르(Jean-Pierre Serre)에 의해서 호몰로지 대수학과 층 이론은 대수기하학에도 이미 적용되고 있었다. 그로텐디크는 이것을 Derived functor 개념으로 발달시켜 더욱 고차원으로 추상화했다.

그로텐디크가 주창한 여러 가지 새로운 관점들 중 주목할 만한 것은, 개개의 대수다양체를 개별적으로 공부할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관점", 즉, 대수다양체들 사이의 함수들, 혹은 모피즘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고 강력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인데, 실제로 이러한 새로운 관점을 이용해서 기존에 존재하던 많은 정리들을 일반화하고 확장했다. 이런 방법으로 가장 처음으로 얻어낸 결과는, 1956년경에 얻어낸 리만-로흐 정리(Riemann-Roch theorem)의 일반화였다. 리만-로크 정리는 사실, 이미 히르체브루흐(Friedrich Hierzebruch)에 의해서 고차원의 대수다양체의 경우로 확장이 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더욱 발달시켜 소위 그로텐디크-리만-로흐 정리(Grothendieck-Riemann-Roch theorem)을 얻어내게 된 것이다. 이 결과는 1957년, 독일(Bonn)에서 있었던 아르바이츠타궁(Arbeitstagung)에서 발표되었으며, 차후에 보렐(Armand Borel)이 세르와 함께 쓴 논문에서 출판되었다.

그로텐디크가 대수기하학에서 이룬 업적은, 그 당시까지 존재하던 모든 대수기하학의 모양 중, 가장 높은 수준으로 추상화된 대통일 이론이었다. 그는, 기존의 대수다양체에서와는 다르게, 닫혀있지 않은 점 (non-closed point)의 개념을 도입했으며, 이 개념은 스킴 이론으로 발달되었다. 이 이론의 틀 안에서는 기존의 대수기하학에서는 사용될 수 없었던 nilpotent 원소들까지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일종의 무한소의 개념을 순전히 대수적인 방법으로 기술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러한 기술적 강력함과 표현의 포괄적임으로 인해 그로텐디크의 스킴 이론은 대수기하학에서의 가장 완성도 높은 언어로 자리매김 하였다. 이 스킴 이론의 발달로 인해서, 현대의 우리는 이제 대수기하학에서, 정수론, 갈루아 이론, 가환대수학, 대수적 위상수학등등의 수없이 많은 도구들을 한꺼번에 아주 일관성 있는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 뿐만 아니라, 반대로 대수기하학의 발전이 저런 각각의 수학 분야들에 대해서도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통합적인 관점은, 예를들어서, 디 모듈(D-module) 같은 새로운 분야의 발달에도 기여하였다.

그로텐디크의 많은 업적들이 EGA(Éléments de géométrie algébrique)나 SGA(Séminaire de géométrie algébrique)등으로 모아졌다. 아마도 그로텐디크의 단일 업적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에탈 코호몰로지(étale cohomology)와 l-adic 코호몰로지(l-adic cohomology) 이론의 개발일 것이다. 이러한 이론들의 도움으로, 앙드레 베이유(André Weil)가 '대수적 다양체위상 수학적인 성질과 정수론적인 성질 사이에는 신비스러운 관련이 있다.'고 관찰했던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유한 체 위에 정의된 방정식의 근의 개수가 그 복소수 해공간의 위상적 성질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베이유는 이런 연관성을 증명해 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코호몰로지이론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그로텐디크 이전에는 베이유을 비롯한 그 누구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감조차 잡지 못하였다. 이러한 제안은 70년대 초반, 그로텐디크의 제자였던 피에르 들리뉴(Pierre Deligne)에 의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는데, 들리뉴의 베이유 가설(Weil conjecture) 증명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들리뉴는 이 업적으로 차후 필즈상을 수상하게 된다. 한편, 그로텐디크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돌연 신비스럽게 수학계를 떠나면서 자취를 감추어 버리게 된다.

그로텐디크의 삶

어린 시절 그리고 공부

그로텐디크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유대인 아버지와 함부르크 출신의 독일계 개신교 신자인 어머니 아래에서 태어났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의 격동기 때문에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로텐디크의 아버지의 이름은 알렉산더 샤피로(Alexander Shapiro; Shapiro가 성),
어머니의 이름은 항카 그로텐디크(Hanka Grothendieck; Grothendieck가 성)이었다.

그로텐디크는 자신의 성을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에게서 따왔다. 양친은 모두 아주 혁명적인 사회주의자였다.
1933년까지 그로텐디크는 양친과 함께 베를린에서 살았으나, 그해 연말 아버지는 파리로 이사를 했으며, 어머니 항카는 그 이듬해에 파리로 이주했다. 그로텐디크은 부모님을 따라가지 못하고 함부르크에 남아서 다른 친척들의 집에서 머물며 학교를 다녔다. 그로텐디크의 부모님들은 한편 그 당시 스페인 내전에서 사회주의자 측의 전투요원으로 전쟁터에 자원해서 싸우고 있었다. 그후, 1939년, 그로텐디크는 독일의 유대인 학대를 피해, 그의 어머니 항카와 함께 프랑스 곳곳의 유대인 피난 캠프를 떠돌아 다니면서 생활했다.

그로텐디크의 아버지는 1942년, 독일의 나치 정권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그 해에 사망하였다.

어린 알렉산더는 1940년 어머니 항카와 함께 환경이 몹시 열악한 리외크로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후 그는 유대인 강제수용소를 전전하게 되는데, 프랑스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의 가혹한 환경 속에서 신체적 공격까지 받으며 극도로 어려운 생활을 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대부분의 생활을 혼자 보냈는데, 그 때의 시간을 수용소 생활이 준 선물로 여겼다. '고독한 시간은 다른 사람과 전혀 소통하지 않고도 생각을 만들고 개념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후 알렉산더는 르샹봉쉬르리뇽으로 피신하고, 현지 학교인 콜레주 세베놀에 다니면서 바칼로레아에 합격했다.

그가 받은 공교육은 아주 부실했지만 그는 '야망이 컸고 수학에 깊은 열정을 느꼈다.' 알렉산더는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진부하고 반복적인 문제들이 너무도 싫어 스스로 흥미로워 보이는 문제를 만들고 그것을 푸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리고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기타 공부는 싹 무시하는 버릇을 키웠다.

특히 콜레주 세베놀의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교과서에 길이, 넓이, 부피의 정의를 제대로 내린 게 없다는 점이 그의 가장 큰 불만이었다. 그는 이러한 '실제 세계에 바탕을 둔 문제들'을 고민하면서 르베그가 수십 년 전에 '르베그의 측도와 적분 이론'이란 이름으로 정립한 측도 이론을 순전히 혼자 힘으로 도출해냈다.

그는 후에 이 사실을 몽펠리에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알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막을 내린 후, 젊은 그로텐디크는 프랑스 몽펠리에(Montpellier)에서 수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미적분을 가르친 술라(Soula)교수에게 수학계에서 일어난 발견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수학 분야에 남아있던 마지막 공개 문제들은 르베그라는 사람이 모두 풀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고, 그는 이 말에 전혀 낙담하지 않았다. 대학에서의 수학 공부를 시작한 이후, 그로텐디크의 뛰어난 수학적 능력은 여러 교수들의 눈에 띄었고, 이들의 추천으로 1948년, 그로텐디크는 더 심도있는 수학 공부를 위해 프랑스 파리로 가게 되었다.

파리에서 그로텐디크는 프랑스의 유망한 수학자 집단과 어울리면서 수학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협력 연구에는 잘 맞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다른 수학자들이 '합의를 통해'참이라고 간주하는 개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싫어했고, 그 개념들을 직접 증명하면서 나아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야심이 매우 커서 쉬운 길을 가기보다는 어려운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을 좋아했고 '모든 것을 무척 힘들게 노력해서 얻었다.' 그는 그때의 기분을, 동료 수학자들에게 수학은 아주 손쉬운 것처럼 보인 반면 자신은 '느릿느릿 굴을 파며 산으로 올라가는 것처럼'느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그 집단에서 매우 뛰어났던 사람들은 유능하고 저명한 수학자가 되었다. 
그러나 30~35년이 지난 후 나는 그들이 우리 시대 수학에 정말로 
심오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에 비해 그로텐디크의 연구는 수학을 조명하는 혁신적인 관점을 도입하며 현대 수학을 확 바꿔놓게 된다.

그로텐디크가 어울린 수학자 집단에는 앙리 카르탕, 클로드 슈발레, 앙드레 베유, 장-피에르 세르, 로랑 슈와르츠가 속해 있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수학자들 중 한 사람은 해석학 분야의 로랑 슈와르츠 (필즈상 수상자)였고, 그로텐디크는 슈와르츠의 지도아래 1950년부터 함수해석학을 공부하였다.

그로텐디크는 공부를 시작하자 마자 금세 위상 벡터 공간(topological vector space)에 대한 세계적인 전문가가 되었으나, 이런 손쉬운 성공에, 이 분야에서는 더이상 공부할 만한 재미있는 문제가 없다고 느낀 그는 1957년부터 더 어렵고 풀리지 않은 문제가 많다고 소문난 대수기하학호몰로지 대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물론,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이 분야들에서도 그로텐디크는 독보적인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정치, 그리고 수학계에서의 도피

그로텐디크의 극좌파적 정치성향과 평화주의적인 정치성향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가 몸소 겪은 끔찍한 제2차 세계 대전중의 어린 시절의 영향때문이었다. 이러한 정치 성향으로 인해 그는 간혹 주변 사람들이 몸서리칠 만한 행동들을 자주 하였는데, 예를들자면 베트남 전쟁중, 미군의 공중 폭격이 가해지고 있던 베트남하노이 근교의 숲속에서 범주 이론의 세미나를 태연하게 연다던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것을, 일종의 반전 시위로 여겼다.
그로텐디크는, 프랑스의 부유한 수학자였던 디외도네(Dieudonné)의 지원으로 프랑스 파리에 IHES(Institut des Hautes Etudes Scientifiques)를 설립하였으나, 자신이 설립한 이 기관에서 1970년에 갑자기 떠나기로 결심을 한다.
(SGA 1, Springer LNM 224의 서문에서 프랑스어로 이유를 작성하였다.) 그것은 바로, 순수한 학문 연구기관인 IHES에, 프랑스 국방부의 군사용 연구자금이 일부 들어왔기 때문에 이에 항의하는 뜻이었다.
그 이유로 그는 잠시 학계를 떠났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가 처음으로 수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었던 몽펠리에 대학으로 가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몽펠리에에서 1988년까지 몸담았다. 1988년에 학계를 완전히 떠나면서 그는 프랑스 남부의 어느 알려지지 않은 농촌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소일하겠다며 모든 것을 버리고 자취를 감추었다.

그의 학계에 대한 비판은 그가 1988년, 크라포르드 상(Crafoord Prize)의 수상을 거절하는 이유로 쓴 편지 (영문)에서 잘 읽어볼 수 있다.